“철책선을 따라 분단의 현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으며……, 빼어난 자연 풍광과 역사의 한 페이지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김포시 홈페이지에 소개된 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 철책길’ 관련 글이다. 대명항과 문수산성을 잇는 이 길의 주요 기착지 가운데 덕포진이 있다. 덕포진은 조선시대 군영으로 구한말 서구열강에 맞서 격돌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격전지였다. 김포 대곶면 신안리에 속한 이 일대가 최근 고고 학계와 언론에 주목받고 있다. 이곳에서 신석기 마을 유적으로 확인된 주거지 53기가 발견된 것이다. 이 마을이 조성된 시기는 신석기 연대 순서에 따라 전기에서 중기로 추정되며, 발굴된 주거지에서 채취한 목탄 시료를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법에 따라 측정한 결과 기원전 3,600년 전후로 확인됐다. 신안리 유적 발굴현장은 덕포진 전시관에서 600m 남짓 더 들어간 곳에 있었다. 불볕더위 속에서도 발굴조사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발굴 현장이 위치한 곳은 강화도와 초지대교가 아득했고 염하가 마주했다. 길게 이어진 철책을 따라 남쪽에 대명항이 있고, 북쪽 가까운 곳에 덕포진과 그 끄트머리에 손돌묘가 있다. 이날 현장 안내를 맡은 김포시청 문화예술과 선경화 학예연구사는 “2014년 덕포진 일대 지표조사에서 조선시대 기와와 자기 조각 등이 확인됐다”라며 “이후 2017년 문화재 표본조사를 거쳐 2019년에 1차 조사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5차에 걸쳐 조사가 진행 중이다”라고 조사 경과를 설명했다.
발견된 주거지는 땅을 파서 만든 수혈식주거지로 신석기시대의 일반적 주거 형태이다. 이곳이 보존 가치가 높은 유적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신석기시대 마을유적으로 국내 최대 규모이기도 하거니와 주거지 구조가 양호하게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발굴된 주거지는 정사각형으로 세로 3.0~6.7m, 가로 3.5~5.9m 규모의 네모반듯한 모양이다. 면적은 약 13~40m2 정도인데 평형으로 환산하면 4~12평 규모다. 주거지의 건축 방법은 먼저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로 땅 안쪽을 일정 깊이로 판 뒤 바닥을 편평하게 다졌다. 주거지의 외곽을 따라 하얀색 페인트를 칠해놓아 형태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정사각형 모양의 주거지에서 병의 목처럼 돌출된 부분이 출입구의 흔적이다. 계단식으로 조성된 주거지도 몇몇 있었다. 출입구의 방향은 대부분 남쪽과 동남쪽을 향한다. 이는 북서풍을 염두에 둔 것으로 강한 바람을 피할 목적으로 보인다.
주거지에서는 유물 수습이 한창이었다. 현재까지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해 갈돌, 갈판, 공이, 석촉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는 높이 10cm 이하부터 최대 45cm까지 다양하다. 특별한 토기도 발견됐다. 바로 평저토기다. 납작 바닥토기라고도 부르는 이 토기는 바닥이 평평하고 두께가 얇은게 특징인데,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쉽게 볼 수 없어 발견 당시 모두가 놀랐다고 한다. 발굴된 다양한 유물로 미루어 보아 전문가들은 신안리 신석기인들이 농경 생활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무엇보다 퇴적평야가 발달한 김포평야 일대는 한반도 최초로 벼농사가 시작된 곳이라는 점에서 무게가 실린다. 만약 이것이 역사적 사실로 밝혀진다면 김포시는 신석기문화의 종주도시로 주목받을 것이다. 신안리 유적이 국가유산으로 지정되면 김포의 문화적 위상은 한층 높아질 것이고 지역 활성화에도 이바지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이라는 과제를 이루려면 체계적이고 전략적이며 거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시는 물론이고 전문가 집단의 유기적 참여와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호응이 절실할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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