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지방행정의 중심 ‥ ‘김포관아(金浦官衙)’ 1998년 4월 1일은 김포가 군(郡)시절을 접고 시(市)로 승격된 날이다. 당시 12만이던 인구는 25년 후인 올해 초 50만을 거뜬히 넘기며 대도시 반열에 오르는 역사적 방점을 찍었다. 도시가 성장하려면 사람(民)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행정은 시민을 도와야 한다. 현재 김포시는 김포시청 김포행정의 메카로 대시민 서비스를 책임지고 있는데, 예전에는 어디서 진행됐을까?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現 김포시청은 87년 12월 준공되어, 98년에 시 승격을 맞이했다. 현 김포시청 건물 준공 전에는 북변중로 65번길 4-8(현 김포엔젤돌봄기관)에 자리했다. 조선 16대 왕인 인조 때 김포현이 군으로 승격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북변동에서 360여 년의 물리적 시간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군청 이전 자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가 인정한 김포장릉 안 재실 터다. 『금릉군지』에 따르면 ‘중간에 다시 고현내면에 있는 장릉 안으로 터를 옮겼다’ 했으며, ‘지금의 재실이 있는 자리가 바로 옛 관아 터다’라고 했다. 『장릉지』 기록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김포현 시절에는 어느 곳에 관아가 있었을까? 역시 『금릉군지』에 ‘임촌면 신곡리에 터를 잡았다’라고 서술되고 있는데, 김포현 자리는 고촌읍 신곡리 옛 고현내면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현재 사우동에 있는 김포시청 자리는 네 번째 터가 되는 셈이다. 김포현이 김포군으로, 김포군이 김포시로 명칭을 달리하며 현재 시 승격 25년만에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옛 지방행정의 리더 ‥ ‘김포수령(金浦守令)’ 우리에게는 ‘사또’나 ‘원님’이 더 익숙한 ‘수령’은 현재 지방자치단체장 급이다. 지방자치단체장은 한 조직의 리더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옛날하고도 아주 오랜 옛날, 김포지역에는 현 김병수 김포시장의 조상급 되는 수령이 몇이나 있었으며, 그들은 수령에 대한 기록을 얼마나 남겨두었을까? 김포읍지, 김포군지, 김포시사 등에 따르면 김포 역대 수령은 170~178명이다. 또한 이들의 기록과 기록으로 남지 않아 표기하지 못한 수령까지 더한다면 김포현(1410년)부터 김포군(1908년)까지 약 500년간 김포지역을 총괄했던 수령은 총 206명(「김포관아 학술연구」, 김포문화원, 2021년, 48p.)으로 추정된다.
본디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으로 리더를 존중해 왔다. 김포 또한 현령·군수·관찰사 등에 대한 예우 차원으로 선정비를 제작해 두었는데, 현재 10기가 김포시청에 보존돼 있으며, 지난해 고촌읍 전호리 515-22에서 발견된 3기까지 총 13기가 과거 김포지역 수령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1997년 2월. 당시 내무부에 접수된 한 장의 문서. 발신자는 경기도로 내용은 김포군(郡)을 김포시(市)로 승격됨이 마땅하다는 공문이다.
같은 해 11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포군의 도농복합형태 시 승격 법률안’이 통과되면서 김포의 시 승격이 공식화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8년 4월 첫 번째 수요일, 그날은 4월을 시작하던 첫날로 현 사우동 김포시청 자리에서 김포는 시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고 지금까지 25년을 앞만 보고 달려왔다. 25년을 숨가쁘게 달렸으니, 이제는 숨을 고르고 뒤를 돌아봐야 할때. 이번 김포마루는 시 승격 25주년을 기념해 역사에 남아있는 김포지역 행정의 중심인 관아와 지방자치단체장 급이던 수령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글 • 양미희 시민기자 도움글 • 김포문화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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