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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年大計’ 김포의 옛 교육기관 향교와 서원을 찾아서

김포마루 | 기사입력 2022/04/02 [00:50]

‘百年大計’ 김포의 옛 교육기관 향교와 서원을 찾아서

김포마루 | 입력 : 2022/04/02 [00:50]

‘百年大計’ 김포의 옛 교육기관

향교와 서원을 찾아서

옛 김포 교육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은 예나 지금이나 ‘百年(백년)의 大計(대계)’라 하여 중시됐다. 지금의 초등학교격인 서당에서 천자문을 뗀 16세 전후 아이들이 본격적인 배움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데, 지방에서 그 기능을 담당한 곳이 바로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이다. 고려시대부터 근대화 이전까지 교육문화의 산실이었던 김포의 향교, 서원을 만나보자.

글 황인문 시민기자

 

900년 역사 김포향교·통진향교

고려시대 각 지방에 박사와 교수를 보내 인재를 양성한 것이 향교의 시초다. 조선 성조 때엔 기능이 강화되어 모든 군·현에 향교가 설치됐다. 학생들은 시를 짓는 사장학(詞章學)과 유교 경전을 이해하는 경학(經學)을 배웠는데, 소학(小學)·가례(嘉禮),사서오경(四書五經)·근사록(近思錄) 등이 교과서였다.

김포향교(金浦鄕校)는 1122년(고려 예종 17년) 창건됐다. 올해 건립 900주년을 맞는다. 원래 장릉 동북방 산기슭(현 김포고등학교)에 있었다. 원종대왕을 장릉으로 모시면서 걸포동으로 이전했다가 지금의 자리(북변중로25번길 38)로 이축했다(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9호).

통진향교(通津鄕校)는 1127년(고려 인종 5년) 창건됐다. 일제강점기 폐쇄되었다가 광복 후 그 기능을 되찾았다. 월곶면 군하리 220번지 일원 소재하고 있으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0호로 지정됐다. 액운을 물리치는 홍살문을 지나 누각 형태의 풍화루(風化樓)가 멋스럽다. 향교에서는 대성전과 명륜당, 내삼문·외삼문·재실(齋室)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 등 5성(五聖)과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우저서원과 대포서원

향교가 고려, 조선시대 관립학교였음에 비추어 서원(書院)은 사립학교였다. 서원의 시작은 조선 중종 37년(1542년)에, 당시 풍기군수를 지내던 주세붕이 고려 말의 유학자였던 안향을 기리기 위해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이 효시다. 서원은 나라에서 지은 기관이 아니지만 임금으로부터 현판을 하사받는 사액서원(賜額書院)은 세제 혜택이나 노비 지원 등 특혜가 주어졌다. 고을의 큰 학자나 정치가가 죽으면 그 제자들이 스승의 위패를 모시고 후학을 가르치는 서원을 열었다.

향교가 공자를 모시는 것에 비해 서원은 우리나라의 학자나 정치가를 모시는 사당 기능을 했다. 향교가 관아 인근 등 지역의 중심지에 자리 잡은 것과 달리 서원은 중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경관이 좋은 곳에 자리 잡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교육열이 대단했던 부모들은 공립 교육기관인 향교보다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을 선호했다. 서원으로 학생들이 몰리자 향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감정동 우저서원(牛渚書院)과 양촌읍 대포서원(大浦書院)이 현존한다. 우저서원은 1648년(인조 26년) 건립, 1675년(숙종 1년) 사액됐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자 학자인 중봉 조헌(趙憲)을 봉향하고 있다(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호). 대포서원은 엄밀히 따져 교육기관으로 볼 수 없다.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양성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정조 때 서원을 건립하려 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근대인 1973년 대포리에 있는 묘소 밑에 사우를 세우고 대포서원이라고 명명했다. 1986년 김포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됐다.

 

여전히 뜨거운 교육, ‘공정’이 숙제

과거 교육은 공정했을까. 향교의 학생들은 ‘교생’이라고 불렸다. 조선 초기 향교 입학 조건은 16세 이상 40세 미만의 평민 이상 자제들을 대상으로 했으며 추천과 시험을 통해 입학이 이뤄졌다. 조선 전기에는 학생들이 대다수 양반이었으나, 16세기 이후 양반 자제들이 대부분 서원으로 가면서, 향교 학생 대다수가 평민으로 이루어지게 됐다. 향교에 입학하게 되면 소과를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며 소과의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 모두 합격하면 진사나 생원이 될 수 있었다. 또한 군역을 면제받는 특권이 있어 이를 위해 입학하는 경우도 많았다.

신분제 사회가 철폐됐지만 우리나라 교육열은 여전히 뜨겁다. 옛 과거(科擧)제도는 행정, 사법, 외무, 기술 등 다양한 고시(考試)제도로 변화했다. 시대 흐름에 따라 교육 방법과 방향성은 달라질 수 있지만, 교육과 관련된 문제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다. 균등한 기회, 평등한 교육은 예나 지금이나 큰 숙제다.

< 우저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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