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깨운 우리 말·글 지킴이 ‘한글날’ 제정에 기여한 식민시대 지식인, 권덕규 한글날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해 세상에 펴낸 것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다. 양력으로 10월 9일, 2006년부터 국경일로 지정됐다. 훈민정음이 세상에 반포된 1446년부터 따지면 한글은 올해 575세 생일을 맞는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생일이 있는 글자 ‘한글’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하나, 크다, 바르다’라는 뜻을 가진 ‘한글’이라는 이름은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이 가장 먼저 썼다. 주시경의 뒤를 잇는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권덕규(權悳奎 1891~1950)는 1926년 9월 29일(음력),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열린 ‘가갸날’ 기념 잔치에서 우리 문자의 명칭을 크고 무한하다는 뜻의 ‘한’을 취택해 ‘한글’로 하자고 정식 제안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28년 ‘가갸날’이 ‘한글날’로 개칭됐다.
글 황인문 시민기자 도움 최시한 숙명여자대학교 숙명역사관장·조민재 김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글로 풀이한 고향 ‘김포스토리’
1935년 12월 6일자 《매일신보》에 「조강물참」이라는 산문이 실렸다. 국문학자이자 역사가인 애류(崖溜) 권덕규의 수필이다. 김포 하성면 석탄리가 그의 고향으로 1891년(고종 28년) 8월 7일 태어났다. 하성면 마조리에 묘역이 있는 남강(南岡) 권상(權常, 1508~1589)의 후손이다. 「조강물참」은 조강연안의 밀물과 썰물 간 수위 차이에 대한 기록물이다. 우리나라 물때의 기준이 된 조강물때는 다른 해안 지역에서 찾을 수 없는 김포의 특별한 역사문화 스토리다.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李奎報)가 조강을 건너며 지은 축일조석시(逐日潮汐詩)에 물때를 남겼고, 조선시대 문신 토정 이지함(李之菡)이 쉽게 풀어 뱃사람들이 노래로 부르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권덕규의「조강물참」은 이규보의 시를 전승자료로 고증하고 풀이했다. 기존의 문헌자료가 한문으로 되어 있어 뱃사람들이 사용한 토박이말을 적는 데 한계가 있었다면 권덕규의 글은 누구나읽기 쉽고 활용도가 높은 한글로 기록됐다. 권덕규는 「조강물참」과 함께김포지역에 전승돼 내려온 설화 「손돌이 추위」에 대해서도 매일신보에 게재했다.
조선어학회 일원 ‘말모이’ 편찬 추진 1913년 휘문의숙을 졸업한 권덕규는 휘문고보, 중앙고보 등 중등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다. 주시경의 직계 제자 중 한 사람으로, 1921년 조선어연구회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어연구회는 훈 민정음 반포 8회갑(480년)이 되는 해인 1926년 처음으로 ‘가갸날’(현한글날)을 기념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은 조선교육령을 공포해 조선인 학교의 교육연한을 단축하고 우리말의 모국어 지위를 박탈했다. 학생들은 대다수 수업을 일본어로 들어야 했다. 우리말을 ‘국어’라 부를 수 없게 된 세상, 위기의식을 느낀 권덕규, 장지영, 이윤재, 최현배등 국어학자들은 말과 글을 지켜 민족을 보존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했 다. 권덕규는 영화 말모이(2018)의 스토리 모티브가 된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된 33인 중 하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의 조선인 민족말살 정책으로 우리말 사용이 금지된 시점에서 한글을 연구한 학자 들을 탄압, 투옥시킨 사건이다. 권덕규는 1931년에 등장한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 수정위원, 정리위원 등으로 활약했다. 조선어학회에서 편찬을 추진한 ‘조선어 사전’의 근간자료인 ‘말모이’ 원고는 작년 12월 22일 문화재 보물 제2085호로 등재됐다.
‘자주’를 외치고, ‘가짜’를 저격하다
권덕규는 수많은 글을 발표한 학자이자 교육자 였지만 당대의 기인으로도 유명했다. 1920년 동아일보에 ‘가짜 명나라 사람 머리에 몽둥이 한대’라는 논설을 발표하며 조선의 유학자들이자주정신을 잃고 있음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강직하고 대담한 성격에 시대에 대한 울분을 술로 달랬다. 식민지 시대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하자면, 고민을 술에 의탁했고 우울한 마음을술로 풀었던 것 같다. “왜놈들의 하는 짓은 말할 것 없고, 요새 가짜왜놈들의 하는 꼴이란 술 취하지 않는 맑은 눈으로는 볼 수가 있어야지!”(정인승, ‘권덕규론’)라며 한탄했다. <조선어문경위>, <조선유기>,<을지문덕> 등 6권의 저서와 논문, 논설, 수필류, 기행문 등 1백여 편의 글을 남겼다. 1942년 조작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됐다. 당시신병으로 구속되지 않았으나 1944년 함흥교도소에 투옥됐다 지병이악화돼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1949년 반신불수로 건강이 좋지 않던중 행방불명됐다. 순탄치 않았던 그의 삶은 1950년 10월 24일 사망한것으로 처리됐다. 뒤늦은 201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아 독립유공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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