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김포 서울 편입 논의로 전국이 요동쳤다. 지금도 진행 중인 김포의 서울 편입. 이에 다소 뜬금없어 보일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인천 서구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오래전 우리 김포의 포구였던 ‘안동포(安東浦)’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안동포는 불과 70여년 전 김포에서의 제일 어장이었다. 또 6‧25 전쟁 당시에는 전진 포구였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던 안동포를 서울 편입에 대한 논의가 오가는 이즘에 우리가 반드시 집어야 할 때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닐까 싶다.
수십 년 전, 헤어졌던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는 낡고 빛바랜 사진 한 장의 단서처럼 안동포에 관련된 실마리를 풀어본다.
❙대마도는 일본 땅. 독도는 우리 땅 … '안동포'는 김포 땅
병인양요(1866년/고종 3)와 신미양요(1871년/고종 8) 등의 두 차례 양요를 겪으면서 서양의 침략에 적극적인 대응책을 모색하게 된 우리나라는 이 과정에서 국방과 치안을 위한 관제 개정, 군제의 개편, 군사시설의 확충과 경비의 강화, 군기의 정비와 시험을 시도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지방의 실정 파악은 시급한 과제였을 터. 이를 위해 1871년 전국적인 읍지 편찬사업을, 이듬해인 1872년에는 전국적인 지도 제작 사업을 추진한다. 이때 제작된 것이 지방지도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소장 중인 이 지도는 총 459매로 우리나라 지방지도로는 가장 많은 양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 중 당시 김포군을 대상으로 제작된 지도는 채색지도인 <김포지도/M/F77-103-194-A>다. 안동포의 흔적은 이 지도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지도에 따르면 고란태면(고촌)과 백석산(인천 서구 소재) 등과 이웃하고 있는 ‘안동포’가 또렷히 표식돼 있다. 또한, 삼각측량법에 의해 1909년부터 1911년까지 제작돼 1916년 간행된 <제2차 지형도(1916년 구한말 한반도 주형도/김포군)>에서도 ‘안동포’의 자리가 김포에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1916년부터 1927년까지 육지측량부에서 발행한 조선토지조사국 측량 지도인 <1919년 지형도_조선 5만분의 1 지형도>에서도, 1941년 제작된 <경기도 김포군 관내>’에서도 ‘안동포’는 김포의 포구였음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부자로 성하게 살았던 갯마을 ‘안동포’
그럼, 안동포는 언제부터 인천 서구에 편제 되었나? 전종한 경인교육대학 사학과 교수는 <근대이행기 조강 연안의 포구 성쇠와 포구 네트워크_김포반도의 거점 포구들을 중심으로_대한지리학회지 제52권 제2호 2017>에서 안동포를 두고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해양 중심의 수운망과 내륙의 정기시장을 연결하는 유통의 積換地(전환지:운송과정에서 운송 수단이 바뀌는 점)로서 발달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김포반도 남부에 위치하여 내륙으로는 吾羅里場(오나리장)과 연결되어 김포평야의 농산물이 유입되고 해양으로는 인천과 연결되어 생필품이나 수산물이 유통되던 안동포가 대표적 사례이다”
1995년 인천 서구로 편입 전 안동포는 김포 제일 어장이었다. 여러 어르신의 증언도 전종한 교수가 정리해 둔 내용을 뒷받침 한다.
다수의 어르신에 구술에 따르면 어촌이 성했던 시절 조기철에는 중선으로 연평에 출어했던 배가 만선으로 귀항했으며, 민어 철에는 어린아이 키만한 민어를 잡아 오기도 했다. 출항에 앞서 풍어제인 용신굿(뱃고사)을 지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안동포 부락에 ‘당집’이라는 곳이 얼마 전까지 있고, 1992년 ‘안동포풍어제’가 마지막으로 치러졌다는 기록도 있다.
조기철이면 연평도까지 배를 띄워 나갔고, 성어기엔 물고기가 차고 넘친 중선이 줄지어 귀항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당시 이 부락에는 마을 식수로 쓰는 우물이 있었는데, 우물을 중심으로 조기 건조장이 있어 ‘조구내리’라는 소지명으로도 불렸다고도 한다.
또 포구 앞 갯벌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해 굴이며, 조개, 방게 등의 어패류가 풍부했다. 환경이 이러하니 이웃 마을은 물론 김포읍 아낙들까지 가족들 먹여 살리겠다고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이곳을 오가던 사람들은 부자로 성하게 사는 갯마을이라며 이곳 ‘부성(富盛)개’라 불렀다.
이처럼 안동포는 김포지역에서 조강포구와 함께 번성한 곳이었음이 자명하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왜 안동포에 대한 일련의 기록을 찾을 수 없는지. 깊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 6‧25전쟁 당시 38선이던 '안동포'
사적 제292호인 김포덕포진 발굴자이자 현 김포시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기송 전 김포문화원장은 1950년 6·25전쟁 시절 안동포가 있던 자리에서 김포읍(감정동 지점 추정)까지가 38선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때가 1950년 9월 달 될 거예요. 왜냐하면 그때 유엔군하고 아군하고 다시 들어와서 인천상륙작전을 할 때인데, 당시 우저서원 고개를 넘어가면 바로 안동포로 빠지는데, 그 안동포부터 김포까지가 삼팔선이었어요(2023년 디지털생활사 아카이빙 사업 자료)”
시대적 배경으로 보자면 1950년 9월 1950년 9월 15일에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었다. 더글라스 맥아더의 지휘 아래 조선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인천에서 UN군과 우리나라 국군이 펼친 그 작전 말이다.
6·25전쟁 초기 당시 미군은 조선인민군에게 연패해 경상도까지 밀려 내려오다가 결국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장악했다. 이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전황이 뒤바뀌게 되는데, 당시 역사적 상황은 김기송 전 원장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사연을 알고 나니 안동포에 대한 미안함이 짙어진다.
그럼, 과연 바다 잃은 마을, 김포가 잃은 마을 안동포는 지금의 어디일까?
인터넷 포털에 안동포 사거리를 검색하면 인천 서구 왕길동 인근이 나온다. 아마 여기서부터가 약 100호가 살았던 안동포 마을 자리가 아니었나 싶다. 이곳에서 많은 사연이 묻혀있으리라.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그 자리에 수도권제1매립지가 산이 돼 있고, 하루에도 수백 대의 차량이 '안동포 사거리' 이정표를 무심히 오고 갈 뿐 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 김포가 김포의 역사를 후대에 남김에 있어 오래전 필연적으로 잃을 수밖에 없던 것들에 애잔함을 갖고 좀 더 자세히 기록하고 남기고 보존하는 게 선행되어야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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