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그게 뭐예요?”
딸이 스테인리스 볼에 담긴 상추에 관심을 보였다. 6시 저녁 식탁 위, 5살 딸의 자리에는 굳이 먹겠다고 고집을 부려 서둘러 구운 고등어가, 내 자리에는 나만 먹게 되어 조금 구운 돼지고기 목살이 놓여 있었다. 엊그제 토종학교 농장에서 나눔 받은 상추는 자연스럽게 내 몫으로 씻어 올렸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거? 며칠 전에네가 딴 거지.”
딸이 그때 그 상추를 기억했나보다. 눈이 반짝 빛난다.
“엄마, 나도 먹을래.” “뭐?”
당근이 아니라면 생채소는 입에도 안 대는 딸이 웬일로 상추를 먹겠다는 건가. ‘엄마 반찬 탐내기 전에 본인 식판에 있는 오이무침, 숙주나물이나 먹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은 꿀꺽 삼키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이거 먹기 어려운 건데.” 이때 목소리는 최대한 의심스럽다는 느낌을 풍겨야 한다. 어린이는 대개 청개구리라 엄마가 원하는 것과 반대로 말해줘야 떡밥을 무니까.
“나 먹을 수 있어.”
옳거니.
“그래? 그럼 조금만 먹어 볼래?” 나는 상추 귀퉁이를 엄지손톱만큼 뜯어 건넸다. 이거라도 먹으면 다행이라는 소망을 담아서. “이건 너무 조금인데.” 꼬맹이의 어깨가 으쓱 솟아 올랐다. 하압. 꿀꺽.
“으음. 맛있어.”
잔뜩 꾸며진 목소리에 과장된 표정. 백상 여우주연상 안 아까운 연기력이다.
“엄마, 나 더 줘. 더 먹을래. 나 많이 먹을 수 있어.”
이번엔 콧대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만 3세에는 인정욕구가 커진다더니, 인정욕을 넘어서 허세까지 절정이다. ‘얘야, 엄마도 아빠도 사실 상추 잘 안 먹는단다. 맛없어.’ 고백은 사춘기 이후로 미뤄두고 일단은 아이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상추를 한 장 꺼냈다.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 “무리가 뭐야?”
세상에. 살면서 이렇게 허세가 넘치는 문장을 본 일이 없다. ‘무리’라는 단어를 모르겠다는 뜻 맞겠지? 설마 “내 사전에 무리란 없다”란 뜻은 아니겠지.
본인이 내뱉은 공약에 충실하게도 아이는 상추를 찹찹 뜯어먹었다. 또 한 장으로는 쌈을 싸 먹었다. 무려 쌈을. 엄마가 싸 먹는 것처럼. 엄마 돼지고기 한 점을 가져다가.
“엄마, 이거 찍어서 아빠한테 보내.” “어? 어.”
나는 뭔가에 홀린 듯 딸의 상추 먹방을 찍었다. 연극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세상에서 상추가 제일 맛있다는 듯 뜯어먹는 5살의 1인극. “나 꼬다리도 먹어. 이것 봐.” 어. 보고 있어. 총 상추 세 장 반을 먹어 치운 널 똑똑히 보고 있다고.
며칠 전만 해도 딸은 “나 양배추 먹을 수 있어” 선언하고는 양배추샐러드 한 가닥을 입에 넣었다 뱉었다. “아, 배불러서 안 되겠네.” 진짜 먹을 수는 있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는 투였다. 그날 이후로도 몇 번의 시도가 있었고, 한 가닥이 서너가닥까지 늘어나긴 했지만 양배추도 아니고 상추를 먹기란 정말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꿈도 안 꿨는데. 5살의 허세란 정말이지 놀라운 것이다.
오늘도 아이는 아침부터 공약을 선포했다. “나 엄마 안 때릴 거야. 엄마한테 소리 안 지를 거야. 위험할 때만 지를 거야.” 평소 내가 지적하던 것들이다. 그래. 그래. 멋지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공약 이행에 실패하더라도 괜찮다. 그냥 그 마음이 예쁘다. 그리고 또 모르지. 그냥 다섯 살도 아니고 상추 꼬다리까지 다 먹는 다섯 살이라면 정말 다 해낼지도 모른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몸도 마음도 쑥쑥 자라난 5세의 5월이 눈부시다.
- 김포 토종학교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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