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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날이야기 … 영사정

양미희 시민기자 | 기사입력 2024/12/17 [14:33]

우리동네 옛날이야기 … 영사정

양미희 시민기자 | 입력 : 2024/12/17 [14:33]

영사정에서 바라보는 보름달은 '영사정 망월(永思亭望月)'이라 해 옛 김포 8경 중 하나였다. 그만큼 김포에서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던 곳인데, 이곳이 유명해진 데에는 조선 정조에 의해서다.

 

이번 우리동네 옛날이야기는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가 사랑했던 그곳. 고촌읍 신곡리에 있는 영사정에 관해서다.

▲ 2024년 가을 영사정.     ©김포마루


 
정조가 사랑했던_영사정 망월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는 원종(元宗, 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仁獻王后, 1578~1626)가 안치된 김포장릉을 찾아 그들의 참배에 정성을 다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남원윤씨의 묘역이 있는 이곳 신곡리를 지나다 잠시 쉬어가는 길에 강기슭에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오른편에 작은 섬이 있는 풍광을 보고 주위의 경관과 경치가 아름다워 영원히 생각나겠다라 했다. 한강 하류의 으뜸가는 절경이라며 친히 이곳을 영사정(永思亭)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추정컨대 오랜 옛날 김포는 한강하구를 따라 소나무밭이 수려했고, 이곳에서 풍광이 좋아 바라보던 작은 섬 백마도(고촌읍 신곡리에 있는 한강 하류의 하중도로, 면적 0.1 km2 작은 섬)20세기 말까지만 해도 한강 유일의 녹지 섬이었으니 정조가 극찬할 만도 하다(출처=인제대학교 족보도서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 어쩜, 삼각산(북한산) 가운데 봉우리에서 올라오는 달은 한강을 굽이 돌아 넓은 영사정의 가슴에 안기는 모습을 보며, 조선의 르네상스를 설계했던 건 아닌지 감히 가늠해 본다. 정조가 사랑했던 이곳 영사정 망월을 보며 말이다.

 

▲ 영사정 망월.     ©김포마루

 

 

영사정_그리고 나라를 사랑하던 남원윤씨 판관공파 사람들

 

정조가 이곳의 이름을 영사정이라 부르기 전, 이곳은 하나의 묘역(남원윤씨 판관공파)일 뿐이었다. 정조가 영사정이라고 불러주자, 이곳은 우리에게 와서 문화유산이라는 꽃이 되었는데, 이곳에 대한 그의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정조는 임진왜란 상주전투로 순국한 윤섬과 병자호란 때 사절한 윤계와 윤집, 효행이 으뜸인 윤유, 그리고 강직한 기개의 윤결 등 충성과 절개, 행실과 의리로 추앙받은 남원윤씨의 인물들이 묻힌 묘역을 영구히 수호하라 명했다.

 

이에 앞서 숙종 7(1681)과 영조 10(1734), 31(1755), 정조 21(1797) 등 세분의 임금이 4차례나 이 묘역을 직접 수호하라 명하고 치제(致祭, 나라에서 제물과 제문을 보내 지내는 제사)를 하도록 했다.

 

영사정의 보름달이 클래스가 다른 데에는 바로 이런 이유가 있어서다. 그들이 이곳을 알뜰히 살피고, 아끼며 보존했던 저변에는 삼각산 넘어 뜨는 보름달을 보며 백성의 안녕과 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군주의 바람이 깃들여 있었을 것이다.

▲ 영사정과 백마도 항공사진(자료=김포시청).


예나 지금이나 보름달은 우리에게 동경의 대상이자 간절함을 바랄 수 있는 대상이었다. 산업화로 도로가 생기고 건물이 높아지고, 화려한 불빛을 당연시하며 살지만, 둥근 보름달에 보내는 간절한 DNA는 매한가지다. 나 자신보다는 가족의 안녕과 무탈을 비는 우리네 정서 말이다.

 

달마다 찾는 보름, 이번에는 가족의 안녕과 무탈보다는 자신을 위한 바람을 빌어보는 건 어떨까? 그동안 잘 살아온 자신에게 말이다. 비단 한강 너머 삼각산에 걸친 영사정의 망월이 아니더라도 필경 그 소원은 이뤄질 게 분명하다. 정조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우리 김포와 함께하고 있는 곳이니 말이다.

▲ 옛 영사정의 모습(자료=인제대 사이버족보/남원윤씨 판관공파 2000).

 

▲2024년 가을, 영사정 ©양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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