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들은 정자라는 곳에서 자연과 혼연일체 돼 쉼과 학문을 탐닉하고 즐겼다. 그들의 향유가 지금까지 전해지는데 하성면에 있는 전류정 또한 그러했다. 다만, 전류정이 건립되기까지 남다른 사연이 있는데, 그 얽힌 사연을 소개 한다.
때는 고려 말기 공민왕 시절. 공민왕은 고려 제31대 국왕으로 고려부흥을 위해 힘쓴 인물이다. 무엇보다 원나라 공주인 노곡 공주와의 사랑 이야기는 지금까지 세기의 로맨스로 회자 되고 있다. 또한, 그는 공민왕은 글솜씨는 물론이요, 미술 등의 예술 분야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이집, 이유, 구홍, 윤규, 김준과 함께 8청(八淸)의 1인이던 민유(閔愉)를 총애했다. 그러나 왕의 곁에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던 민유는 당시 개혁에 앞장섰던 신돈이 권문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난을 일으키자 학사 주사옹과 함께 동성현(월곶면 고막리)으로 거처를 옮긴다.
몸은 동성현으로 옮겼으나 민유와 주사옹은 선비로서 학문적 소양을 더하고자 했을 터. 그들은 김포를 돌며 비로소 학문을 소양 할 마땅한 장소를 찾는다. 한강이 전류(顚流)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봉성산 자락이었다.
전류정 소재지는 하성면 전류리 산51번지다. 전류정 터를 기준으로 뒤로는 봉성산이, 앞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다. 명당 중 으뜸으로 삼는 배산임수(背山臨水). 민유의 풍수지리적 통찰력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역사 속 이야기는 이러하나 실질적으로 전류정에 대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다만, 병자호란 때 순절한 여흥민씨 가문 형제들과 동순하지 못해 근신하며 사는 민지옥의 충의효절을 가상히 여긴 인조가 전류라는 당호를 내려 전류정이란 정자를 짓고 마을 이름도 이같이 했다거나, 터가 한강하구에 있어, 조선 후기까지 정자로 그 기능을 했다는 등의 이야기만 전해진다.
또한, 전류정나루와 함께 주막도 있어 사람의 왕래가 빈번했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수백년 전, 그때의 운치와 향유는 그들만의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전류정에 오르면 하늘이 내 것이요, 손에 닿을 듯 한강의 전류(顚流)는 나만의 것이 돼, 시 한 수 족히 읊조릴 소양이 절로 갖춰지지 않을까? 여기에 탁주 한잔은 보너스.
이에 앞서 공민왕에 대한 민유의 충절은 과거에 이어 한강하구의 물길이 돼 현재로 투영되고 있음을 살피는 게 우선돼야 할 것이다. 이는 고난의 역사를 이겨온 우리 조상들에 대한 작은 도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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