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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힐까 두려운, 잊혀서는 안 될 우리의 역사 ‘조강포구’:김포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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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힐까 두려운, 잊혀서는 안 될 우리의 역사 ‘조강포구’

김포마루 | 기사입력 2022/10/06 [21:37]

잊힐까 두려운, 잊혀서는 안 될 우리의 역사 ‘조강포구’

김포마루 | 입력 : 2022/10/06 [21:37]

서해와 한강을 휘감고 있는 김포는 예부터 땅길보다 물길이 발달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 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포구와 나루가 형성돼 상권 발달은 물론 이 지역 주민들의 배를 기름지게 했다. 이처럼 해안 따라 형성된 포구와 나루에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이야기가 쌓이자 여러 지역 문화가 집중되는데, 이번 김포마루에서는 김포에서 가장 번성했던 ‘조강포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글 양미희 시민기자

도움글 김포문화재단(2016), 『김포의 미래, 포구에서 읽다』, 부제 ‘19~20세기 한강하구와 김포포구’

 

한강과 임진강 그리고 예성강이 하나 되는 ‘조강’

조강포구를 이야기하기 전, 조강에 대한 짤막한 상식을 짚고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조강이 위치한 곳은 북한강과 남한강을 합친 한강과 그 한강을 이끌고 온 임진강 그리고 북한 개성을 지나온 예성강이 한데 어우러진 곳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조강을 조상님의 강, 할아버지의 강이라 칭하고 한자어 조상(할아비 조(祖)와 강 강(江))을 섞어 조강(祖江)이라 부르고 쓴다.

지리상으로 이렇다 보니 이곳은 수상교통이 발달하고, 그로 인해 이곳을 차지하려는 쟁탈전이 끊임없는 이어졌다. 삼국시대부터 한국전쟁까지 말이다.

 

잊힐까 두려운, 잊혀서는 안 될 우리의 역사 ‘조강포구’

한강하구의 최대 물류단지이며 어업기지 역할을 톡톡히 한 조강 그리고 조강포구.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의 기억 속에,우리의 역사 속에서 조강과 조강포구는 사라진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3년째인 1953년 7월 27일, 전쟁을 휴전하기 위한 정전협정을 체결하게 되는데, 유엔과 북한 그리고중국만이 이 협상 자리에 참석했으며, 협상문에 서로의 서명을했다. 남측은 배제한 채 말이다.

당시 이들은 조강 일대를 부르기 편한 ‘한강하구(Han RiverEstuary)’로 통일하고 공표한다. 그 이후부터 조강과 조강포구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한강하구’로 기록돼 있다.

 

같은 이름 다른 지역, 또 ‘다른 이름의 조강포구’

2016년 김포문화재단에서 우리 포구 연구를 대대적으로 실시하고 우리의 미래를 포구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당시 연구 결과를 들춰보면 조강포구를 비롯한 김포지역 포구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발굴했는데, 그중 흥미로운 사실은 북측 개풍군에 우리와 같은 조강리와 포구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일제강점기 근대 지도다. 이 지도에 따르면 김포 조강포구와 개풍군 조강포구의 뱃길은 서로 마주하고 있어 서로 통하였으나, 김포에서 가장 큰 포구였던 조강포구가 번성했던 것에 비해 개풍군 조강리는 대지 규모가 작아그 기능이 우리 포구와 달랐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도 이곳 일대는 철책 넘어 차가운 긴장감이 맴돌고 있다.

다만 옛 명성을 회상하듯 조강포구를 알리는 표지석만이 차가운 긴장감을 늦출 뿐이다. 조강과 조강포구 잊혀서는 안 될, 잊어서는 안 될, 우리 김포의 아니 우리나라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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