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종착지, 김포 반도의 끝자락. 물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 서로 대치 중인 적막감이 감도는 침묵의 강, 조강(祖江). 해상 물류의 중심지로 화물과 여객, 고깃배가 넘실대던활기찬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리워 희망을 품는 것은 아마도 ‘평화’라는 이름으로 다가올 미래 때문이다. 글 황인문 시민기자
한반도 수상교통의 ‘나들목’ 1953년 7월 체결된 정전협정이 인위적으로 물길을 끊어놓기 전 조강은 한반도 수상교통의 가장 중요한 길목이었다. 강화를 만나는 지점에서 황해도로 흐르는 서쪽 유로와 강화, 김포 사이를 흐르는 남쪽 유로 인 염하 두 갈래로 나뉜다. 조강 서쪽 유로는 해서·관서지방 선박들이주로 이용했고 염하는 삼남 지방을 오가던 선박들이 이용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한강하구 최대의 물류단지이자 어업기지였던 조강포 는 끊임없이 배가 드나들었다. 주막거리가 조성될 정도로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라 전역에서 걷히는 세곡의 대부분이 서해 바닷길을 통해조강 나루에 모였다. 배들은 다시 한강을 거슬러 한양에 가거나 예성강을 따라 개성으로 갔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서울은 물론 문산과 개성 등 경기도 내륙을 향해 바닷길과 연결되는 중요한 수로였다.
강물의 시간, 조강의 노래 조상 조(祖) 자를 써 ‘할아버지 강’이라 했다. 태백산맥에서 태어나 강원도와 경기도를 거치며 청년시절을 보내기까지 514km에 달하는 여정을 이어온 한강이 김포에 이르러 얻은 이름이 ‘조강’이다. 장년기를
거쳐 할아버지가 된 한강은 함경남도 마식령에서 발원한 임진강, 황해북도 수안군 언진산에서 발원한 예성강과 더불어 지금의 조강을 이뤘 다. 강과 강이 모이고, 바다와 내륙을 연결하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 소통의 강인 셈이다. 옛 문인들도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고려 말 대문호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당시 조강 풍경을 ‘조강부(祖江賦)’라는 시에 담았 다. 이규보는 또한 유명한 ‘축일조석시(逐日潮汐詩)’를 남겼는데 하루두 번, 8시간 밀물이 들고 4시간 썰물이 나는 조강 유역의 조수간만의차이를 시로 지었다. 뱃사람과 지역민들의 안전을 위해 외우기 쉽도록 한 것이다. 후에 토정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이 이규보의 시를 다듬어 ‘조강물참’이라는 노랫말로 남겼다.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지식인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자신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熬神話)’ 중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의 배경으로 이곳 조강 일대를 삼았다.「조강은 일명 ‘삼기하’라 하니 세 강이 바다로 함께 조회하기 때문이지요. 고기·소금·과일·베·쌀이 산같이 쌓일 땐 하루에도 이천척이 오 갔다오…」 17세기 초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 지은 조강행(祖江行)의 일부다.
여보게! 뱃사공, 나 좀 건네주게 애기봉에서 강 건너 보이는 북한 개풍군 마을 이름은 ‘조강리’다. 김포월곶면 ‘조강리’와 마을 명칭이 같다. 예전엔 ‘상조강’, ‘하조강’으로 불렸다. 형제마을인 셈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직선거리로 1.3㎞ 에 불과하다. 실제 거리보다 마음의 거리가 멀다.
조강은 중립수역으로 서해 NLL의 시작점이다. 해군 함정이 활동할 땐UN군기를 건다. 대한민국 해군에 의해 해안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지만 DMZ는 아니다. DMZ는 땅의 경계다. 한강하구 중립수역은 DMZ 와 이어지는 별도의 경계다. 정전협정문에도 민간인의 선박은 한강하구 중립수역을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조강은 ‘평화도시 김포’의 상징이다. 마음의 경계가 풀리면 가장 먼저 남북 주민 들이 상봉하게 될 장소는 아마도 이곳, 조강일 것이다. 파헤쳐야 할 지뢰도 없고 허물어버릴 군사시설도, 끊어낼 철조망도 없다. 강물에서노 젓는 뱃사공을 만나는 일이 더 이상 희한한 광경이 아닌, 일상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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