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싯적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뭐, 단군시대부터 따지자면 365일 밤낮으로 이야기해도 부족하겠지만, 이번엔 조선시대 외국군의 침입으로 압축해 우리동네 옛날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역사에 관심이 다소 없었다 하더라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 등 두 전투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을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들을 방어하는데 핵심지역이 바로 우리동네 김포였다는 사실이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선, 병인양요는 1866년(고종 3년) 병인박해 때 프랑스인 신부가 처형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가 조선의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이고, 신미양요는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고자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김포 덕포진’을 말할 때, “조선시대 진영으로, 이곳은 서울로 통하는 바닷길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대였던 곳”이라 일컫습니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높직한 평지에 있어 적을 방어하기에 최적이라 할 수 있죠. 이러한 곳을 우리는 잊고 있다가 1980년에 김기송 전 김포문화원 원장님에 의해 발견돼 발굴하게 되었습니다.
발굴조사 결과 7개의 포탄과 2개의 상평통보 등이 출토되었고, 주춧돌과 화덕자리가 발견되기도 했지요. 또한, 돈대와 대포를 쏘는 포대, 그리고 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고 포병을 지휘하는 파수청도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돈대는 중요한 전략 지에 있어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함대와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싸웠다는 기록을 보아 정말 한양으로 통하는 바닷길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자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명감으로 1981년 9월 25일 사적으로 지정돼 ‘덕포진’으로 불리다가 2011년 7월 김포의 지명을 넣어 ‘김포 덕포진’으로 공식 명칭이 변경되었답니다.
날이 좀 선선해지면, 우리동네 옛날이야기가 담긴 ‘김포 덕포진’을 찾아 시간여행해 보는 게 어떨런지요. 참고로 이곳을 찾으면 ‘김포 덕포진’을 처음을 발견한 전 김포문화원 원장이던 김기송 문화관광해설사가 전하는 자세하고 상세한 우리동네 옛날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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