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마루 2024년 3월

1만5천명이참여한만세운동 일본인과일본자본이김포에진출한것은 1914년 5월부터였다. 당 시일본인들은양동면에양동식산이라는농림회사를시작으로연이 어여러회사를설립했다. 그러면서개간을통해농경지확장과더불 어미곡의도정까지독점했다. 그결과조선인소작농들은착취에가 까운높은소작료를내기에급급했을것이다. 일제의압제에울부짖는민중들의억울한탄식은나날이커졌다. 그 러던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 소 리가울려퍼졌다. 일제의폭압에대한저항과독립의열망이분출된 것이다. 이열기는김포지역에까지들불처럼번져 1919년 3월 22일 부터 3월 29일까지 8일간 양촌·고촌·월곶 등지에서 12회에 걸쳐 전 개되었다. 참여자는 1만5천명이었고, 그가운데 120명이다쳤으며, 200명이체포되었다. 이는당시경기도내에서두번째규모에해당 하는 만세운동이었다. 미주 지역에서 발행되는 <신한민보>는 김포 지역의만세운동을가리켜 ‘1만여명의대관중’이라기사화하였다. 김포의 3·1운동은오라니장터를중심으로한양촌·대곶지역, 군하리 장터와 통진향교, 면사무소, 주재소 등을 돌며 진행된 월곶지역, 신 곡리뒷산에서독립만세를외친고촌지역등이대표적이다. 이가운 데 걸어서 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보기 좋은 양촌지역을 탐방했다. 양촌·대곶면민 만세운동 유적비에서 출발해 현충탑까지, 4km 남짓 한거리이다. 양촌오라니장터의만세운동 공원에는독립선언서, 양촌대곶면민만세운동유적비, 대한독립군위 령탑이 나란히 서 있고, 그 좌우에 만세운동 주도자들의 비석이 줄 지어 있다. 비석에는 훈장과 표창에 대한 정보를 비롯해 해당 인물 에 대한 정보까지 새겨놓았다. 양촌의 만세운동은 오라니장터를 중 심으로백일환과이살놈, 이병린등이주도하였다. 그중이살놈은독 립선언서수십장을옷속에감추고고향에돌아온, 이화학당의33세 만학도 여성이었다. 만세운동이 오라니장터에서 열린 이유는 당시 오라니장이 김포읍장과 군하리장을 합친 것의 두 배에 달하는 김포 에서가장규모가큰장으로많은사람이모이는곳이었기때문이다. 양촌오라니장터만세운동은1919년3월29일, 오후2시와4시에걸 쳐 전개되었다. 같은 날 두 차례로 나눠 만세운동을 벌였던 것으로 보아 일제의 감시와 방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근대식 교육을 받은 촉망받는 청년 들이었다. 그들은사전에준비한태극기를가슴에품고장터에서군 중들에게 나눠주며 선두에 서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장터는 태극기 물결로넘쳤고만세소리로들썩였다. 오~ 양촌대곶면민만세운동유적비와대한독립군위령탑이나란히서있다 독립운동유적지지도 3·1 39 2024. 03 M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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